내년 6월 치러질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채 1년도 남지 않았다. 지역의 정치판은 벌써 선거 국면에 접어든 듯한 분위기다. 여야 정당은 물론 중앙과 지방을 막론하고 후보군들이 거론되면서 움직임은 점차 본격화되고 있다. 그런데 최근 전북자치도 산하 출연기관장들의 잇따른 사퇴 소식이 들려오면서 지역사회에 적지 않은 파장을 낳고 있다. 도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공기관의 수장이 임기를 다하지 않고 선거 출마를 명분으로 중도에 퇴진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만 보더라도 우려가 크다. 이남호 전북연구원장은 임기를 10개월 남겨둔 상태에서 사퇴하며 사실상 교육감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최정호 전북개발공사 사장은 3년 임기 중 불과 1년만 근무하고 시장 선거에 나서겠다며 퇴진했다. 심보균 익산시도시관리공단 이사장은 임기 절반도 채우지 못한 채 역시 시장 선거 출마를 이유로 사임했다. 또 사례는 다르지만, 최병관 전북도 행정부지사 역시 정년을 5년 이상 남겨둔 상태에서 명예퇴직하며 출마 준비설에 휩싸였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공공기관의 책임을 다하지 않은 채 개인의 정치적 유불리를 계산하며 처신했다는 점이다.
문제는 이로 인해 발생하는 공백과 혼란이다. 기관장이 사퇴하면 후임자를 임명하기까지 길게는 수개월이 걸린다. 그 사이 주요 정책이나 사업은 지연되고, 업무 방향은 흔들리며, 직원들의 사기는 저하된다. 기관 운영의 연속성이 끊어지고 장기 비전이 흔들린다. 특히 출연기관은 정책 연구, 산업 지원, 공공 서비스 제공 등 도민 생활과 직결되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데, 수장의 잦은 교체로 인한 부작용과 피해는 결국 도민에게 고스란히 돌아온다. “기관장이 또 공석이다”, “방향성이 오락가락한다”는 불만이 쏟아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히 개인의 선택 문제로 치부할 수 없다. 공공기관장 자리가 지방선거를 겨냥한 ‘스펙 쌓기용’ 발판으로 악용되는 구조적 문제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임명권자인 전북자치도나 지방자치단체가 정치적 고려 속에서 인사를 단행하다 보니, 기관장 자리가 전문성과 책임보다는 정치적 계산의 산물로 여겨지는 측면이 있다. 결국 “정치판에 뛰어들 준비가 되면 언제든 사퇴해도 된다”는 잘못된 관행이 굳어진 셈이다.
물론 헌법이 보장하는 피선거권은 존중돼야 한다. 법이 정한 하자가 없는 한, 누구든 선거에 출마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공공기관 수장의 경우 그 권리 행사에는 분명한 제약과 책임이 뒤따라야 한다. 도민 세금으로 급여를 받고 공공적 책무를 수행하는 자리인 만큼, 최소한 임기를 충실히 마무리하고 나서 정치적 도전을 모색하는 것이 도리다. 임기를 무책임하게 내려놓는 순간, 해당 기관과 도민에 대한 의무를 저버린 것이 된다.
따라서 출연기관장 임명에 따른 제도적 보완이 시급하다. 첫째, 임명 당시 임기 보장에 대한 확약을 명문화할 필요가 있다. 일정 기간 내 중도 사퇴 시 불이익을 주는 장치를 마련하면 최소한의 책임성을 담보할 수 있다.
둘째, 임용 과정에서 도덕적 책무를 강화해야 한다. 기관장 후보자는 청문회나 임용 심사 과정에서 임기 내 사퇴 의사가 있는지, 정치적 도전 가능성이 있는지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 출마 가능성이 높다면 아예 임명에서 배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셋째, 공공기관 경력을 선거에 이용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쿨링오프’ 제도 도입도 검토할 만하다. 예컨대 기관장직을 사퇴한 뒤 일정 기간 동안 선거에 출마할 수 없도록 제한하는 방안이다. 이는 정치적 자유를 과도하게 침해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공공성을 해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로 충분히 논의할 수 있다. 넷째, 사퇴 과정에서 도민에 대한 책임성을 강화해야 한다. 출연기관장이 임기 중 사퇴할 경우, 사퇴 이유와 향후 계획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고 기관의 업무 연속성을 보장할 수 있는 인수인계 절차를 반드시 밟도록 제도화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사 원칙의 확립이다. 출연기관장은 특정 정치인의 측근이나 ‘자리 나눠주기’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철저히 전문성과 책임성을 기준으로 임명해야 한다. 정치적 배경이나 선거 출마 여부가 아닌, 기관 운영 능력과 지역 발전 기여도가 최우선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기관장 스스로도 자리의 무게를 느끼고 끝까지 책임을 다하려는 의지를 가질 수 있다.
출연기관은 단순한 행정 편의 기관이 아니다. 연구와 정책 개발을 통해 지역의 미래 전략을 마련하고, 산업과 고용을 지원하며, 시민 생활의 질을 높이는 중추적 역할을 한다. 이런 기관이 정치 도전의 징검다리로 전락한다면, 그 피해는 결국 도민이 짊어지게 된다.
이제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전북자치도와 지방자치단체는 공공기관장 인사에 있어 더 이상 정치적 안배 논리를 앞세우지 말아야 한다. 책임감 없는 중도 사퇴가 반복되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도민 앞에 떳떳한 인사 관행을 확립해야 한다. 공공기관은 특정인의 정치적 야망을 키우기 위한 무대가 아니라, 도민을 위한 봉사의 최전선임을 다시 한번 분명히 인식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