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대 l 축소

만추(晩秋)를 반추(反芻)하며

배해수 / 무형문화연구원 선임연구원·고고인류학 박사
가을 들녘 어느 날, 하루살이와 메뚜기, 개구리가 친구가 되어 즐겁게 놀고 있었다. 저녁 무렵이 되자 메뚜기가 말했다. “얘들아, 오늘 즐거웠어. 우리 내일 다시 놀자.” 그러자 하루살이는 내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조금 더 놀다가 이번에는 개구리가 말했다. “얘들아, 우리 내년에 다시 만나자.” 이번에는 메뚜기가 내년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오래전 들었던 우화이다. 그때는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로 들었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은 그 속에 담긴 의미가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하루살이에게는 내일이 없고 메뚜기에게는 내년이 없다.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는 시간조차 모든 생명에게 같은 길이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덧 한 갑자의 세월을 지나고 보니 시간이라는 말이 새삼 낯설게 느껴진다. 젊은 날에는 앞으로 살아갈 날이 지나온 날보다 훨씬 많을 것 같았다. 이루고 싶은 것도 많았고, 만나야 할 사람도 많았으며, 미처 하지 못한 일들은 언제든 다음으로 미룰 수 있다고 믿었다. 내일은 늘 오늘의 뒤에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나이를 더하면서 삶의 풍경도 달라진다. 멀리 떨어진 누군가의 이야기로만 여겼던 생로병사가 어느새 가까운 사람들의 안부 속에 들어와 있다. 오랜 벗의 병환 소식을 듣고, 얼마 전까지 함께 웃고 이야기하던 사람의 빈자리를 떠올리면서 세월이 지나간다는 말의 무게를 새삼 느낀다.

때로는 어제가 오늘보다 나았고, 오늘이 내일보다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내일이면 조금 더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자는 뜻은 아니다. 다만 오늘 곁에 있는 사람이 내일도 같은 자리에 있으리라는 약속은 누구에게도 주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 때문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참 많은 것을 다음으로 미룬다. 바쁘다는 이유로 안부를 미루고, 마음에 남은 말을 전하지 못하고, 언젠가 다시 만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 언젠가가 더는 오지 않을 수도 있음을 깨닫는다. 돌아보면 오래 마음에 남는 것은 이루지 못한 큰일들보다 제때 건네지 못한 작은 인사와 함께하지 못한 평범한 하루들인지도 모른다.

가을이 깊어 가는 들녘에 서면 한 해 동안 자라난 것들이 저마다의 시간을 마치고 있다. 누렇게 익은 곡식은 거두어지고, 나뭇잎은 바람에 떨어진다. 한때 무성했던 풀들도 빛을 잃어 간다. 자연의 변화는 해마다 되풀이되지만, 그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은 해마다 같지 않다.

이 가을에는 유난히 한 벗의 모습이 자주 떠오른다. 치열하게 살아왔던 한 사람의 지난날과 이제는 조금 지쳐 보이는 뒷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을 그에게도 아직 이루지 못한 바람이 있을 것이고,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과 가 보고 싶은 곳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 마음을 생각하면 가슴 한쪽이 저려 온다.

한 사람의 삶을 돌아보며 원도 한도 없이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이 과연 있을까. 아무리 오래 살아도 아쉬움은 남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은 언제나 모자랄 것이다. 그래서 지금 살아 있다는 사실과 서로의 안부를 물을 수 있는 오늘 하루가 더욱 귀하게 느껴진다.

하루살이에게는 내일이 없었고 메뚜기에게는 내년이 없었다. 그 우화를 떠올리며 문득 생각한다. 내게 허락된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오늘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그의 안부를 물을 수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만추의 들녘에서 아픈 벗을 생각한다. 그에게도, 나에게도, 그리고 살아 있는 모든 생명에게도 아직 맞이할 가을날이 더 많이 남아 있기를 바란다.

이전화면맨위로

확대 l 축소